못쓰게 된 투창들이 널려 있었다. 그것은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지평 너머까지 그 창들이 흩어져 있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이곳이 어딘가 싶어 둘러보는데, 이리저리 보아도 시야에 걸리는 건 발치에서 굴러다니는, 더이상 쓸 수 없는 창들 뿐이었다. 다만 멀리서 물 소리가 들려왔다. 물이라. 적어도 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가면 대략적인 지형을 가늠해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무뎌진 투창들을 조심스레 건너갔다. 제법 신경써서 걷는데도 자잘한 상처가 끊이질 않았다. 젠장. 어차피 못쓰게 될 놈들이라면 몽땅 녹여서 다시 만들던가 해야지, 여기에 이런 걸 산같이 방치해둔 놈은 어지간히 멍청한 놈일게 분명했다. 이걸 치우면서 지나가야 할 까 고민했지만, 발로 창들을 쓱 밀어봤다가 그 밑에 또 창들이 그득한 것을 보고, 어이가 없어 최대한 날을 덜 밟게 손등을 보호하는 쪽만 찾아서 딛었다.
젠장
발에 채이는 투창의 양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아서 이걸 싹 도로 제련한다면 철강에서 이름 좀 날릴 수 있겠다는 헛생각이 들었다. 주위에 창 말곤 아무것도 없어서 쓸데없는 생각만 드는 게 분명했다. 제법 높은 창의 언덕을 올라가다 발등을 한 번 더 베었다. 홧김에 창을 걷어차려다 그래봤자 상처만 늘어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새 베인 자리에서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는지 피비린내가 풍겼다. 상처를 싸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귀찮아 내버려두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언덕의 끝이었다. 일단은 여기를 벗어나는게 먼저야.
덜걱,
고작 한 걸음이 남았을 뿐인데 숨이 턱 끝까지 가득 찼다. 힘들어, 젠장.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러고 있는 거람. 짜증이 나서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쓸데없는짓이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투덜거리지 않으면 언덕을 넘어 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 드디어. 마지막 한 걸음이었다. 분명이 개울이 보일 터였다. 이정도의 물소리라면.
예상대로 조금 좁은 개울이 있었다. 이쪽에서 건너가는 개울의 초입마저도 창이 그득했다, 하지만 저편에는 비옥한 토지가 보였다. 그 위에 푸르게 돋아난 잔디가 전부였다. 이쪽에 창이 그득한것과는 동떨어지게도, 반대편에는 단 한 자루의 창만이 땅에 비스듬히 꽂혀있었다.
저건-
익숙한 창이 보였다. 자신의 투창과는 다른 육각의, 좀 더 묵직하고 날카롭게 찌르기에 좋은 그것은,
저게 왜 저기에 있어.
기사단에, 회사에 남아있던것마저 몽땅 빼돌려 자신의 공방 가장 깊숙한 곳에 몰래 감춰둔 것이었다. 왜 저기에 있는 거지? 저것은 곧 다리오의 마지막 욕심이었다.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저것을 갖기 위해서 모든 귀찮음을 무릅쓰고, 성가신 조약들도 몇개 몰래 어겨가면서 겨우 남은 것들을 간수하고 있었다. 어느 간 큰 놈이 저걸 빼간거야.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기 위해서 금고에, 그앞에는 함부로 문을 따려고 시도하다간 팔 하나 가볍게 날아갈 장치까지 해 두었었다. 무슨 수로 그걸 뚫은 거야? 어찌되었건 저걸 다시 금고에 다시 넣어두어야 했다. 저건 내 거야.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서둘러 가려다 발이 미끄러져 그대로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개울이 점점 가까워져왔지만 같이 굴러떨어지는 창 때문에 생채기가 몇 개 더 생겼다. 마음먹은대로 도통 되질 않는다, 아오 정말이지.
위에서 올려다볼때는 짧은 줄만 알았던 개울은 얕지만 제법 거리가 길었다. 좀 더 앞으로 가니 더이상 창도 밟히지 않고 진로를 방해하는 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내 걸 되찾아야 했다. 어느 미친 놈이-
누군가 팔목을 붙잡아 왔다. 놀라 그대로 팔을 휘감아 비틀어 주도권을 잡으려 했지만 그대로 단단하게 버텨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하게 잡힌 팔목이 아팠다.
젠장, 어느 놈이야!
마주한 것은, 굉장히, 그리운 얼굴이었다. 더이상 기억이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 이것은 악몽이다. 악몽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만 가게.
여전했다. 남빛의 예장과 단단한 견갑, 다만 시선을 마주하지 않게 하는 투구는 없었다. 언제나의 갈빛 머리칼이 귀밑에서 짧게 흔들리고 선명한 시린 얼음빛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곧게 시선을 마주해왔다. 놀라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무어라 말을 해야 될 것 같았는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번을 어물거리다, 그만 그대로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무작정 그를 끌어안았다. 가장 선명한 기억속의 모습처럼, 그 모습 그대로 등을 가만히 쓸어왔다.
그만 가게.
그리고 그 다정스런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그제서야 얕은 개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경계였다. 산 사람을 위한 땅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땅을 가르는 경계. 다리오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말리는 알베르토는-
그만 그 속내가 뻔해 코웃음치고 말았다.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팔을 뿌리치려고 한번 더 내쳤지만, 팔을 단단히 잡고선 놓지 않았다.
바보냐? 아쉬울 것 없거든?
그래, 그런 사람이었지. 알베르토는 짧은 말을 내뱉고서는 팔을 잡아당겨 다시 제 품으로 오게 했다. 알베르토의 어깨 넘어로 그놈의 창이 보였다. 그러니까 이거만 건너면 된다 이거지.
조금만 더 , 조금만 더 있다가 오게.
내가 왜!!
네가 없는 세상에, 내가 왜!!!!
갑자기 개울의 바닥이 질퍽해지더니 발이 쑥 파고들었다.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이는 손을 잠깐 잡아주고서는,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이 알베르토는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야. 내 경우에는 막아서줄 사람이 아무것도 없어서, 죽음이 가까워지는 줄도 모르고 이곳을 정처없이 헤메었네마는,..자네의 경우엔 내가 만류해 줄 수 있어서.
나쁜 자식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홧김에 뻗은 주먹이 뺨에 스쳤다. 그걸 피하지도 않고 얌전히 보고있더니, 언제나의,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서는 잔인하게도 작별의 말을 건넸다.
돌아가게. 시간이 아주 조금 더 허락하는 세계로. 그리고, 그게 온전히 끝나는 순간에. 그때 다시 보세.
그리고서는 어깨를 밀쳐 개울에 빠트려버리는 것이었다. 어느것이든 붙잡으려 팔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순식간에 숨을 좁혀오는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숨이 가빠올 정도였다.
허억 -
스피어, 정신이 듭니까?
익사 직전에 물 밖으로 빠져나온 것 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억지로 일어서려 하니 별수없다는듯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꿈이- 아직도 손에 그를 끌어안았던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침투 이후의 귀환이었다. 체크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그것부터 따져 물었다.
귀환인원은?
KIA 셋, 당신이 MIA가 될 뻔 했습니다만, 저기 저놈이 기절해있는걸 들쳐업고 왔어요.
고개를 돌리자 매번 못난이라고 구박하던 놈이 눈을 찡긋해보였다.
미친 새끼, 눈버린다. 앞에봐
다리오의 폭언에 그는 과장되게 실망한 듯한 제스쳐를 취해보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짐이 될 것 같으면 버리고 올 것이지.
못마땅한듯 작게 중얼거리니 무릎 아래를 찢어버리고 환부를 보던 위생병이 지랄말라는 듯 식염수 한병을 더 부었다.
어느 멍청이가 그 순간에서 당신을 버리고 옵니까? 그리고 그만 떠들어요, 안그래도 출혈양 많으니 그러다 기절하면 정말로 여기서 KIA로 이력 갱신하는거에요.
어차피 더 떠들 힘도 없어 간이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런데, 사경에서 헤메는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히죽댑니까?
내가 뭐.
정신 혼미한 상태에서 날뛰길래 손목 붙잡아서 제압하고 다리 환부에 식염수 처붓는데 계속 히죽거렸다고요. 주위 놈들 겁먹은거 안보입니까?
그제서야 옆을 보니 눈이 마주치는 놈들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애인 봤다.
누구요? 그, 오래전에 찬바람맞았다던 사람 말입니까? 뭐라든데요?
개새끼, 지금 말고 나중에 오라더라.
좋은 사람이네요. 찬바람맞아도 싼 짓 해서 헤어진거 아닙니까?
이죽이는 미친 놈 얼굴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식염수 통을 정통으로 맞추고 나서야 녀석은 떠드는 걸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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